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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파이프, 열린 경계 — 최고은의 「Meridian」

2026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박은수 실습기자

벽 속에 숨어 있던 파이프가 한국관을 관통하며 뻗어 나간다. 작가 최고은이 베니스 자르디니에서 묻고자 한 것은 단 하나다. 이 경계들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Meridian」의 재료가 될 동 파이프 더미 앞에 선 최고은 작가.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 내 한국관 전경. 원통형 구조의 건물 외벽을 따라 최고은 작가의 동 파이프가 뻗어 있다.

베니스 자르디니(Giardini)는 묘한 장소다. 울창한 숲 사이로 각국의 국가관이 저마다의 부지를 차지하고 나란히 들어서 있다. 프랑스관, 독일관, 영국관, 일본관, 그리고 한국관. 나무와 건물, 자연과 국가가 뒤섞여 공존하는 이곳에서 국경은 때로 낮은 수풀의 형태를 띤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는 절개되고 파열된 동 파이프가 건물을 관통하며 뻗어 있다. 작가 최고은의 「Meridian」이다. 건물 내부에 숨겨져 오던파이프는 시원하게 밖으로 드러나 갈라지기도 하며 이리저리 뻗어간다. 오히려 열린 채로 더 유연한 상태가 되어, 한국관의 안과 밖을, 그리고 이웃한 일본관 방향으로 조용히 나아간다.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이 경계들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벽 속에 숨은 파이프, 몸을 관통하는 침술

최고은은 파이프를 오랫동안 작업의 재료로 삼아왔다. 그에게 파이프는 단순한 산업재료가 아니라 "흐름을 조직하는 구조"다.

파이프는 물과 에너지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대부분 벽 안이나 바닥 아래 숨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거의 인식되지 않습니다. 가전제품이나 가구, 배관과 같은 기성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실제로 지탱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구조들이죠.

비가시적 인프라에 대한 이 오래된 관심이 이번 작업에서는 국가관이라는 장소와 만나면서 개념적으로 확장되었다. 이전 작업에서 파이프는 주로 산업제품의 규격과 기능을 전복하는 조각적 실험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특정 장소의 역사와 구조에 직접 응답한다.

한국관의 역사와 구조, 그리고 자르디니라는 환경 속에서 파이프는 단순한 재료를 넘어 공간 전체의 흐름을 읽고 연결하는 선이되었습니다.

한국관 중심 기둥의 내부. 평소라면 벽 안에 감춰져 있었을 배관과 전선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제목 'Meridian'에는 두 겹의 의미가 담겨 있다. 지리학적으로는 북극과 남극을 잇는 자오선을, 동양 의학에서는 인체 안에서 기가 흐르는 경락을 가리킨다. 파이프는 이번 작업에서 한국관을 하나의 몸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한국관 중심 기둥 내부에 숨어 있는 인프라, 사라진 나선계단의 기억 같은장소의 조건들이 파이프의 움직임을 결정했다.

파이프는 침술의 바늘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내지만 동시에 회복을 위한 개입이며, 분리를 전제로 한 경계에 새로운 연결을만들어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파이프가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 통합성은 깨지지만, 열린 구조는 오히려 더 유연해진다. 이 역설이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다.

완결되지 않은 건축 — 국가관과 해방 사이

자르디니의 국가관 체제는 화려하지만 모순적이다. 각 나라는 자국의 건축과 작업으로 존재를 과시하지만, 그 건물들은 서로 불과 몇 걸음 거리에 붙어 있다. 최고은은 이 구조를 "정체성을 선언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관계를 시험하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특히 한국관은 자르디니에 가장 늦게 자리를 잡은 국가관 중 하나로, 복잡한 조건 속에서 어렵게 들어선 건물이다. 최고은은 답사하는 내내 이 건축을"끊임없이 주변 환경과 협상하며 살아남아 온 존재"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비엔날레 한국관 내부의 모습.

완결된 국가의 상징이라기보다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감각은 이번 전시의 핵심 키워드인 '해방공간'과 맞닿아 있다. 전시가 출발점으로 삼는 '해방공간'은 1945년 해방 이후 남북 정부 수립 이전의 과도기를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이지만, 최고은은 그것을 과거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아직 완결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읽는다.

저는 해방을 어떤 이상적인 자유의 상태라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와 조건들이 끊임없이 관계를 조정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생각합니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돌봐야 하는 상태에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해방. 두 개의 미완성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Meridian」이 시작된다.

경계 위의 협업 — 수풀, 파이프, 그리고 팔레스타인까지

답사 과정에서 최고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뜻밖의 장면이었다. 한국관과 일본관 사이, 낮게 자란 수풀이었다. 일본관이 식물로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경계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이동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수풀을 가로질러 다녔고, 자주 밟히는 부분은 듬성듬성 비어 작은 길처럼 변해 있었다.

인간이 심은 식물이 경계를 표시하고, 다시 인간의 발길이 그 경계를 흐린다. 최고은은 이 장면에서 자르디니 전체를 "국가와 자연의 질서가 중첩되어 있는공간"으로 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발견은 곧장 하나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일본관의 작업이 한국관의 퍼포먼스로 들어오고 최고은의 파이프가일본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방식.

생각해보면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역사 때문에 특별한 의미로 읽히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국경을 지우려는행위라기보다, 경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작은 개입에 가깝습니다.

최고은은 이것을 바느질에 비유했다. 천의 앞뒤를 느슨하게 꿰어놓은 뒤 실을 당기면 서로 떨어져 있던 면들이 하나의 주름을 만들며 연결되듯이.

제가 상상한 것은 바로 그 실을 당기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아직 완전히 묶이지 않았지만 이미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 상태 말입니다.

경계에 대한 이 질문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올해 비엔날레는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와 국가관 참가 논쟁이 전시장 안팎을 달구며 예년과달리 무거운 공기 속에서 열렸다. 국가와 영토, 예술과 정치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 어느 때보다 첨예했다.

비엔날레 현장에 머물면서 국가와 영토, 역사에 대한 질문이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예술 역시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영역일 수 없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최고은의 대답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던 관계를 드러내고, 익숙한 질서를 다른 시각으로바라보게 하며, 서로 다른 경험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픈식 날, 최고은 작가(좌측)가 최빛나 예술감독, 노혜리 작가, 그리고 펠로우들과 함께 한국관 앞에 섰다.

흐르는 대로

마지막으로, 이번 비엔날레가 작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물었다. 최고은은 '한국 대표'라는 표현보다 다른 말을 택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되었고,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제도적 지원, 그리고 예술 생태계의 뒷받침 속에서 작업을 이어올 수있었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작업이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깊어졌습니다.

처음 전시 제안을 받았을 때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사회적 맥락이 강한 프로젝트를 자신의 작업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시기에 제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최고은은 짧게 답했다. "흐르는 대로요~" 갈라진 파이프처럼, 열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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